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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축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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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축구단은 1925년 창단되어 1935년 해체된 일제강점기 시대의 축구 클럽이다. 불교청년회 축구단을 모태로 하며, 1920년대 전성기를 누렸다. 1925년과 1933년 전조선축구대회 우승, 1926년과 1927년, 1934년에 준우승을 차지했다. 1926년 해외 원정을 다녀온 한국 최초의 축구 클럽이기도 하다. 백명곤의 재정 지원을 받았으나, 1930년대 재정난과 경성 축구단의 창단으로 인해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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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축구단
기본 정보
클럽 이름조선축구단
풀 네임조선축구단
국가일제강점기 조선
설립연도1925년 (불교청년회 1917년)
해산연도1935년
홈구장경성운동장 (현 동대문운동장)
수용인원16,000 (증축전)
구단 정보
구단주백명곤
감독이건표 (1925-1928)
정인창 (1928-1929)
백명곤 (1933-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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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조선축구단의 역사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 1917년 ~ 1925년: 불교청년회 축구단 시기
  • 1925년 ~ 1930년: 1920년대 (전성기)
  • 1930년 ~ 1935년: 1930년대 (와해기)

2. 1. 불교청년회 축구단 (1917년 ~ 1925년)

불교청년회 축구단은 조선 축구단의 모태가 된 축구단으로, 창단과 초기 활동을 하였다.

2. 2. 전성기 (1925년 ~ 1930년)

불교청년회 축구단은 1920년대 중반 재정난으로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불교청년회 회원 이건표가 호남의 대부호 백명곤과 협의하여, 불교청년회의 선수 구성을 그대로 유지한 채 조선축구단을 발족시키기로 한다.

창단 당시 조직은 다음과 같다.

직책이름
단장박윤관
감독이건표
고문정인창
선수김원태(주장), 손재수, 김충배, 박긍진, 김영희, 손희염, 김원해, 김제정, 권태호, 최대순, 황점룡 등



조선축구단은 창단 직후, 4월에 열린 제6회 전조선축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같은 해 11월에는 평양기독청년회 주최의 전조선축구대회 결승에서 평양의 무오축구단을 꺾고 우승한다. 1926년 9월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축구대회 (관서체육회)에서도 무오축구단을 꺾고 우승하지만, 11월 서울에서 열린 전조선축구대회에서는 무오축구단에 패해 준우승에 머무는 등 평양 무오축구단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한다. 이러한 라이벌 구도는 1930년대 초 조선 축구의 경성-평양 양강 구도의 전초가 된다. 한편 조선축구단은 한국 최초로 해외 원정을 다녀온 축구 클럽이다.[8]

5차례의 해외 원정 기록은 다음과 같다.

횟수시기장소
11926년 10월일본
21928년 1월중국 상해
31929년 2월중국 상해
41934년 2월일본 관동
51934년 4월중국 천진


2. 3. 와해기 (1930년 ~ 1935년)

백명곤이 사업에 실패하면서, 1930년대 들어 조선축구단은 재정난을 겪는다. 1933년에는 같은 서울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경성축구단이 창단되면서, 많은 선수들을 빼앗기게 되어 팀은 와해 직전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경성축구단 창단 작업에 참여했던 김원겸이 다시 조선축구단 쪽으로 무게 중심을 두면서, 부활하는 모습을 보인다. 김원겸은 만석꾼 아들이자 경성군 단장이었던 최성면을 스폰서로 하고, 조선일보사 이원용 기자를 매니저로 하여 팀을 재조직한다. 1933년 11월에 열린 제14회 전조선축구대회에서 지역 라이벌 경성축구단을 꺾고 우승을 차지하는데, 이 경기는 보성전문(현 고려대학교) 출신이자 조선축구단 소속인 김원겸과, 연희전문(현 연세대학교) 출신이자 경성축구단 소속인 이영민의 대결로도 주목을 끌었다. 이어 사실상의 구단주 백명곤의 주도하에 1934년에는 일본 및 중국 천진 원정을 감행한다. 이 원정에서는 경성과 평양의 선수들을 골고루 선발하여 사실상 전조선의 대표팀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들은 이해 두 차례 해외 원정에서 무패를 기록하면서 명성을 떨친다. 하지만 조선축구단은 이듬해인 1935년 6월 열린 제9회 전조선아식축구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것을 끝으로, 창단 11년 만에 해체되는 운명을 맞이한다.

3. 특징

조선축구단은 이름과 달리 현재의 국가대표팀으로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전국의 유명 선수들이 모여[2] 경기 수준은 국가대표팀에 비견될 만했다. 구단의 성격은 사실상 경성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 클럽의 모습을 띠었는데, 이는 일제 치하의 조선이 독립된 국가가 아닌 하나의 지방이었고, 조선축구협회가 운영하는 팀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2]

백명곤은 재정난으로 해체 위기에 있던 불교청년회 축구단을 인수하여 조선축구단으로 재발족시킨 인물이다. 대지주의 아들이었던 그는 독일 유학을 다녀왔으며, 스포츠카와 해리슨 오토바이를 소유하고 경성 거리를 다닐 정도로 부유했다.[2] 축구를 좋아하여 자비로 조선축구단을 운영, 가난한 선수들에게 월급을 지급했고, 낙원시장 일대의 그의 집은 조선축구단의 합숙소와 같았다. 중국인 요리사를 고용해 선수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고, 크리스마스에는 선수들을 위한 파티를 열고 산타로 분장해 선물을 나눠주기도 했다. 해외 원정 때에는 영국제 홈스펀 양복을 단체복으로 맞춰주는 등 조선축구단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2] 그러나 1930년대 이후 재정난으로 1935년 조선축구단은 해체된다.

3. 1. 클럽의 성격

조선축구단은 그 명칭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국가대표팀 성격으로 보기는 어렵다. 물론 전국의 유명 선수들이 모여 있었다는 점[2]에서 경기 수준은 지금의 국가대표팀에 비견될 만한 팀이었지만, 구단의 성격에 있어서는 사실상 경성을 기반으로 하는 지역 클럽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이는 일제 치하의 조선이 독립된 국가가 아니고 하나의 지방에 불과했다는 점, 공식적 축구협의체인 조선축구협회가 운영하는 팀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3. 2. 백명곤

백명곤은 재정적 어려움으로 해체 위기에 있던 불교청년회 축구단을 인수하여 조선축구단으로 재발족시킨 인물이다. 대지주의 아들이었던 그는 아버지의 권유로 독일 유학을 다녀왔으며, 당시로서는 드물게 스포츠카와 해리슨 오토바이를 소유하여 경성 거리를 돌아다닐 정도로 부자였다.[2]

축구를 유독 좋아하여 자비로 조선축구단을 운영하게 되었고, 가난한 선수들에겐 월급까지 지급하였다. 낙원시장 일대가 집이었으며, 그의 집은 곧 조선축구단의 합숙소와 다름없었다. 중국인 요리사를 고용해 선수들에게 산해진미를 대접하는가 하면, 크리스마스에는 선수들을 위해 악단을 불러 파티를 열고, 직접 산타로 분장해 선수들에게 선물을 나눠주기도 하였다. 해외 원정 때에는 선수들을 위해 단체로 고급 영국제 홈스펀 양복을 단복으로 맞춰주는 등 조선축구단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2]

그러나 1930년대 이후에는 재정난에 허덕이면서, 결국 1935년에는 조선축구단이 해체된다.

4. 해외 원정 기록

조선축구단은 해외 원정을 다녀온 한국 최초의 축구 클럽이다.[8] 5차례의 해외 원정 기록은 다음과 같다.

순서시기원정 지역
11926년 10월일본
21928년 1월중국 상해
31929년 2월중국 상해
41934년 2월일본 관동
51934년 4월중국 천진


5. 주요 선수

김용식과 함께 조선 축구의 실력을 일본에 과시한 선수로 평가받는 김원겸이 조선 축구단의 주요 선수로 활동했다.

5. 1. 김원겸



김원겸은 일제 강점기 조선의 축구 선수였다. 김용식과 함께 조선 축구의 실력을 일본에 과시한 선수로 평가받는다.

5. 2. 김용식



'''김용식'''(金 容植|김용식일본어, 1910년 7월 25일 ~ 1985년 3월 8일)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이자 감독으로, 한국 축구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신의주 출생으로,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 대표팀 선수로 활약했고,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 대표팀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하며 한국 축구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일본 대표팀 선수로 참가하여 스웨덴과의 경기에서 3-2 역전승을 이끌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 이 경기는 '베를린의 기적'으로 불리며, 일제 강점기 조선인들에게 큰 감동과 희망을 안겨주었다.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참가했다.[1] 한국 축구가 국제 무대에 첫 발을 내딛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나, 8강 진출에는 실패했다.

김용식은 뛰어난 기량과 리더십을 갖춘 선수이자, 탁월한 지도력과 헌신으로 한국 축구의 초석을 다진 감독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업적은 대한민국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어 기려지고 있다.[1]

6. 역대 주요 성적

대회우승준우승
전조선축구대회1925년, 1933년1926년, 1927년, 1934년
전조선축구대회 (관서체육회)1925년, 1926년


참조

[1] 뉴스 안녕 ! 한국 축구의 성지 http://sports.media.[...] 플라마 2007-09-05
[2] 뉴스 얘기로 풀어본 한국 스포츠 80년 - (15)백명곤과 조선축구단 http://dna.naver.com[...] 경향신문 1978-02-03
[3] 웹인용 송기룡 『축구가족 2000년 1월호』대한축구협회 발행, 2000.01. http://blog.daum.net[...] 2011-05-29
[4] 뉴스 조선축구단 사진 http://ikfhs.tistory[...] 2022-01-04
[5] 문서
[6] 서적 축구 = 1 : 國技축구 그 찬란한 아침 국민체육진흥공단 1997
[7] 뉴스 축구의 양우승팀 - (上)숭실전문(下)조선축구단 http://dna.naver.com[...] 동아일보 1933-11-05
[8] 서적 韓國蹴球百年史 라사라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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